엔씨소프트 김택진 사장 풀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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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9 11:38
** 엔씨 소프트 김택진 사장은 다 아시죠?
리니지를 비롯하요 요즘 아이온으로 전세계 게임시장을 움직이는 사람.
IT 분야의 한국최고의 갑부, 와이프인 천재소녀 윤송이 전 SKT상무
좀 과장된 내용이 있지만, 한번쯤은 읽어보면 좋을 듯 싶네요.
출생 1967년 3월 14일
학력 서울대학교대학원 컴퓨터공학 (박사과정 중퇴)
- 벤처 기업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써 매년 한국 부자들의 순위를 메기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김택진 사장이지만 정작 그의 어린 시절은 무척 가난하였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던중에 부도를 내서 집안이 급격하게 기울었기 때문이다. 빚쟁이들에게 얼마나 독촉을 당했던지 김택진 사장의 아버지는 그 괴로움에 집을 가출까지 하게 된다. 김택진 사장의 어머니는 행방불명된 남편을 찾기 위하여 갓난 아기인 김택진 사장을 엎고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 다녔다. 지인으로부터 지방의 한 낚시터에서 김택진 사장의 아버지를 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걸음에 달려 나갔다. 원래 김택진 사장의 아버지는 사업 실패후의 좌절과 고통으로 인하여 자살을 결심하고 낚시터에 갔던것이다. 하지만 하늘이 도우셨는지 물에 뛰어들기 바로 직전에 낚시터를 찾아 나섰던 김택진 사장의 어머니와 마주치게 되었다. 순간 어머니의 등에 엎혀 있던 김택진 사장의 눈과 마주치자 차마 김택진 사장의 아버지는 물속으로 뛰어들수가 없었다. 앞으로 살아갈 아이의 미래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세상과 맞서 싸워야 한다고 느꼈다. 처 자식 에 대한 책임감으로 김택진 사장의 아버지는 자살을 포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빚쟁이들을 찾아 나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모든 돈을 꼭 갚을 테니 그때까지 자신을 믿고 조그만 기달려 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김택진 사장의 아버지는 전국 방방 곡곡을 돌아니면서 양말과 옷등을 팔았다. 무거운 짐들을 들고 산동네의 집들까지 일일이 방문해서 물건을 팔정도로 악착같이 일하였고 결국 빚을 조금씩 갚아 나갈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김택진 사장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와 믿음이라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다. 열심히 일해서 나중에라도 반드시 갚겠다는 다짐을 하자 대부분의 빚쟁이들이 아버지의 말을 믿고서 기다려줬고 또 어떤 사람은 격려까지 해주었는데 이는 아버지가 사업을 하면서 신용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김택진 사장의 아버지는 연락이 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까지 일일이 찾아가서 빚을 다 갚았는데 김택진 사장은 이때 아버지의 모습에 감동하였고 자신도 아버지처럼 항상 떳떳한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평생의 좌우명을 가지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김택진 사장은 육상선수로 활약하였다. 학교에서 달리기 대회를 하면 항상 1등을 하였고 학교대표로 지역대회에 출전해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대개 스포츠를 통해서 사람들은 경쟁심과 승부욕등을 배우기 마련인데 특이하게도 김택진 사장은 겸손이라는 것을 배웠다. 지역구 대회에서는 그래도 잘나갔는데 정작 서울시 전체에서 개최하는 대회에 나가서는 성적이 좋지 못했다. 큰 대회에서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는 걸 발견하고는 세상에는 정말 많은 실력자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한때나마 자신이 대단한 육상선수라고 생각했던 자신은 세상 물정 모르는 우물안의 개구리였다는 점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이때부터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세상에 수 없이 많은 고수들과 경쟁해서 최고가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함으로써 스스로에게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 더 값진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어린시절 김택진 사장을 사로잡았던 것은 보통의 어린아이들 처럼 아톰이나 마징가 같은 로보트를 주제로 한 만화였다. 이 덕분에 김택진 사장의 관심사는 과학분야로 발전하였고 과학의 기본은 수학이라는 말에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 그래서 이미 중학교 시절에 그는 고등학교 수준의 수학을 마스터할 수 있었다. 수학을 공부하면서 김택진 사장은 세상의 원리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그는 라디오키트를 구입해서 조립을 하기보다는 기판을 보면서 기계의 작동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더욱 고심하였다. 어린시절부터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호기심 많은 소년이었던 김택진 사장이었지만 정작 그는 고등학교때까지 의사나 변호사 같은 근사한 직업을 가지려고 하였다.
그런던 어느날 한살 아래의 동생방을 우연히 들어갔다가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선택하게 된다. 동생방에는 개인용 컴퓨터의 효시인 애플2가 있었다. 그는 애플2를 보자마자 그야말로 한눈에 반해버렸고 컴퓨터의 세계에 빠져버렸다. 오늘날 게임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크리에이터들이라고 할 수 있는 빌 로퍼(스타크래프트,디아블로), 존 카멕(둠,퀘이크), 사카구치 히로노부(파이널 판타지)가 애플2를 통해서 개발자의 꿈을 꾸었다. 그런데 김택진 사장은 다른 게임크리에이터와 다르게 애플2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새롭게 개발하는 것보다는 컴퓨터의 근본적인 작동원리를 알고 싶어했다. 컴퓨터란 원래 실리콘과 같은 반도체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래서 김택진 사장은 컴퓨터의 핵심부품인 반도체 연구를 위해서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로 입학하였다.
한글로 한국을 버전업시키다.
1985년 한국 최고의 명문대인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지만 김택진 사장은 금방 실망하고 말았다. 하루라도 빨리 컴퓨터라는 것을 완전히 마스터 하고 싶었는데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김택진 사장의 지적 욕구를 총족시켜줄만하 사람이 없었다. 결국 김택진 사장은 스스로 모든 것을 터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 컴퓨터의 메카인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컴퓨터에 관련된 소식을 하나라도 알아내려 하였고 최신의 외국서적을 입수하여 탐독하여 나갔다. 새벽이 온지도 모른체 책에 몰입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컴퓨터에 대한 새로운 원리를 하나 터득할 때마다 그 기쁨에 눈물까지 흘러가면서 컴퓨터를 정복하여 나갔다.
그렇게 컴퓨터에 매진하던 어느 날 평소처럼 컴퓨터의 전원을 키던 순간 그의 머리속에서는 컴퓨터가 켜져서 메모리에 데이터가 저장되고 CPU가 데이터를 처리해서 그래픽카드로 데이터를 보내고 이를 모니터 화면으로 표시되는 모든 과정이 머리속에서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가상세계인 매트릭스의 세상을 깨닫고 파란색의 2진수 화면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있었듯이 김택진 사장은 컴퓨터가 돌아가는 내부구조와 작동원리를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컴퓨터의 작동원리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되자 그는 컴퓨터를 활용해서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자 하였다.
원래 김택진사장은 한국에서 애플 컴퓨터 같은 하드웨어를 제작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김택진 사장의 관심은 소프트웨어로 옮겨갔고 결국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의 세계로 입문하게 된다. 하지만 전문분야인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분야는 혼자서 모든 것을 다하는데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김택진 사장은 자신과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 컴퓨터 동아리를 찾아 나섰다. 학생회관 2층에 있던 SCSC(서울대 컴퓨터 연구 동아리)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 순간 펼쳐진 동아리방안의 풍경을 보면서 김택진 사장은 자신의 인생도 달라지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자신처럼 컴퓨터에 미친 사람들과 함께 하자 김택진사장 실력도 일취월장하였다. 아마추어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 통신 기반의 전자 게시판 버들골 BBS를 만들어 낼정도였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란 김택진 사장에게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은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시인이 머릿속에 있는 여러 이미지들을 글을 통해서 표현해내듯이 김택진 사장은 자신이 꿈꾸는 모습들을 컴퓨터로 구현해내었다. 화가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이 김택진 사장은 컴퓨터 모니터 화면속에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가 컴퓨터 연구 동아리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자 당시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다니던 이찬진 사장이 김택진 사장에게 함께 워드프로세서 개발을 함께 하자고 하였다. 이찬진 사장은 대학교 레포트를 작성하는데 컴퓨터를 이용하면 훨씬 편할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하기로 마음먹는다. 물론 이전에도 몇 개의 워드 프로세서가 존재했지만 일반인들이 사용하기가 불편했고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이찬진 사장은 후배인 김형집과 우원식을 포섭하여 워드프로세서개발을 진두지휘하였다. 하지만 워드프로세서 개발은 그래픽 처리부분에서 난항을 거듭하였다. 그래서 이에 대한 해결사로 이찬진 사장이 특별히 영입한 인물이 바로 김택진 사장이었다.
김택진 사장은 원리에 집착하던 인물이었던 만큼 그가 사용하는 프로그래밍 언어는 기계어인 어셈블리였다. C언어나 베이직처럼 개발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들은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기계어로 변환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어셈블리는 기계어 그 자체이기 때문에 따로 변환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는 관계로 빠른 처리속도를 자랑한다. 특히 그래픽 처리 부분은 컴퓨터에서 가장 속도를 잡아 먹기 때문에 어셈블리로 그래픽 처리 부분을 개발하면 많은 부분에서 이득을 얻을 수 이었다. 이찬진 사장이 팀의 구세주로 어셈블리 전문가인 김택진 사장을 스카우트하려 한 건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찬진사장의 제의에 김택진 사장은 바로 워드 프로세서 개발팀에 합류하기로 결정한다.
김택진 사장은 한창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85학번이었다. 그래서 자신도 민주주의를 위하여 거리에 나가서 투쟁을 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 자책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김택진 사장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시대적 대세임으로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김택진 사장은 민주주의 이후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서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컴퓨터야 말로 대한민국의 미래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에 워드프로세서 개발은 김택진 사장에게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세종대왕이 창시한 한글을 컴퓨터에서 자유롭게 쓸수 있게하는 일이야 말로 민주주의를 위해서 돌을 던지며 시위하는 것 만큼 민족을 위해서 값진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더욱 김택진 사장은 워드프로세서 개발에 매진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워드프로세서가 바로 아래아 한글이었다.
아래아 한글은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의 효시로 불리울만큼 사회전반에 엄청난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이 오직 아래아 한글을 쓰기 위해서 컴퓨터를 구매할 정도로 킬러 애플리케이션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마치 미국에서 로터스와 같은 스프레드 시트 프로그램덕분에 컴퓨터 이용인구가 늘어났듯이 아래아 한글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였다. 아래아 한글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수 있었던 것은 누구나 쉽게 쓸수 있는 그래픽기반의 명령체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래아 한글 이전의 워드프로세서는 마치 도스에서 명령을 내리듯이 텍스트로 입력을 해주어야 했다. 그래서 일반 사람이 사용하기에는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고 실제로 워드프로세서를 입력하기 위해서는 각종 복잡한 명령어와 코드를 암기하여야하는 전문가가되어야 했다. 하지만 아래아 한글은 메뉴에서 유저가 원하는 명령을 선택만 하면 되었다. 이는 텍스트기반의 도스에서 그래픽 기반의 윈도우로 발전하는 것만큼의 큰 혁명이었다. 결국 그래픽 처리부분을 담당한 김택진 사장의 뛰어난 능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또한 과거의 워드프로세서는 글자 하나를 입력하고도 컴퓨터화면에 그 글자가 표시되기까지는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하지만 아래아 한글은 입력즉시 화면에 바로 출력되었는데 이 역시 어셈블리 전문가인 김택진 사장이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의 속도를 향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아래아 한글은 당시 현존하는 모든 컴퓨터에서 구동되었는데 이 역시 그래픽전문가인 김택진 사장의 힘이었고 화면에서 보이는 글씨와 프린터된 글씨가 동일하게 출력하게 해주는 위지윅((WYSIWYG)기능 역시 김택진사장의 작품이었다.
아래아 한글이 출시 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이찬진사장은 우원식, 김형집씨와 함께 한글과 컴퓨터라는 회사를 창업하였다. 하지만 김택진 사장은 학교에 남아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기 위해서 대학원에 입학한다. 그는 이때 사람들이 처음 컴퓨터를 입문할 때 키보드의 자판을 익히는데 애를 먹는다는 것에 착안하여 한메타자교사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한 후 한메소프트를 직접 창업한다.
또한 당시만해도 운영체제 환경에서는 한글이 지원되지 않았다. 한글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고가의 한글지원카드를 구입해야만 했다. 컴퓨터에서 자유롭게 한글을 쓸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사명으로까지 생각했던 김택진 사장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에 돌입한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제품이 한메한글이었다. 판매량 1위를 달렸다. 도스와 윈도우 같은 운영체제뿐만 아니라 각종 응용프로그램에서 자유롭게 한글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 한메한글의 등장은 그야말로 아래아 한글만큼이나 컴퓨터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비록 김택진 사장이 한메소프트를 창업하였지만 본격적인 사업의 시작은 아니었다. 다. 김택진 사장의 관심사는 여전히 훌륭한 인재들에게 도움을 주는 교수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새로운 도전
대학원 졸업 후 박사과정으로 진학하려던 김택진 사장에게 현대전자가 병역특례의 혜택과 해외연수를 보장하면서 취직을 제안 한다. 그런데 이때 마침 공교롭게도 김택진 사장은 7년동동안 사귀었던 애인과 이별을 한 직 후라 실연의 아픔을 겪던 때였다. 그래서 김택진 사장은 그녀를 잊기 위해서 현대전자가 제안한 해외연수를 결심한다. 그야말로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생각에서였다. 1991년 미국의 보스턴 전자 연구소에 도착한 김택진 사장은 열악한 환경에 경악을 하고 말았다. 방한칸밖에 없었고 모든 것을 다 처리하여야 했다.
인터넷의 세계에 푹빠져 버린다. 컴퓨터에서 자유롭게 한글을 쓸수 있게 만들겠다는 하나의 사명을 완수해내자 또다시 새로운 도전꺼리가 등장한 것이었다. 전세계의 컴퓨터를 서로 연결시켜주는 인터넷환경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통신 표준 규격인 TCP/IP 기술을 마스터하여야 했다. 1년 6개월 동안 연구에 매진한 끝에 한국으로 돌아온 김택진 사장은 한국최초의 인터넷 기반의 포탈서비스인 아미넷(지금의 신비로) 을 개발한다. 현대전자에서 김택진 사장은 병역특례 요원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였고 고 정주영회장이 주목하는 인물이 되었다. 김택진 사장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산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를 MS 리저널 디렉터로 선정한다. 리저널 디렉터는 MS의 제품들을 무료로 제공해주고 제품에 대한 의견을 모니터링해주는 일을 한다. 그런데 마이크로 소프트의 리저널 디렉터는 각 나라에서 한두명 밖에 뽑지 않았다. 리저널 디렉터가 되었다는 것은 김택진 사장이 명실공히 한국 최고의 프로그래머이자 컴퓨터 전문가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현대그룹 내부에서는 김택진 사장이 구축한 인터넷 서비스인 아미넷을 두고서 분열이 일어났다. 애초에 처음 사업을 시작한 현대전자에서 아미넷서비스를 계속해야 한다고 했지만 현대정보통신사업부에서 아미넷을 가져가려고 하였다. 현대전자와 현대 정보통신이 서로 인터넷 사업분야를 전담하기 위해서 주도권 싸움을 하자 정작 아미넷의 총 개발 책임자인 김택진 사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년넘게 사업이 표류되었고 인터넷사업을 놓고서 그룹간의 파워싸움을 보면서 김택진 사장은 대기업에 대한 염증이 느껴졌고 회사를 새롭게 창업할 결심을 하였다. 김택진 사장이 독립을 하겠다고 하자 현대라는 안정적인 대기업을 다니던 20명의 동료들이 사표를 쓰고 그야말로 아무런 밑천도 없는 새로운 회사에 합류하였다. 김택진 사장이 창업한 회사가 바로 오늘날 벤처기업의 시작이라고 불리우는 엔씨소프트이다. 엔씨소프트라는 이름은 새롭게 회사를 창업하기전에 뜻을 함께하는 직원들 사이에서 다음회사의 구상한다는 의미로 불렀던 Next Company의 약자였다.
엔씨소프트는 창업하자 마자 SK로부터 인터넷 기반의 PC 통신서비스인 넷츠고 프로그램 제작을 의뢰받았다. 국내최초로 100% 순수 인터넷 기반의 넷츠고 서비스를 성공적으로 구축하면서 엔씨소프트는 명성을 쌓았고 그 덕분에 대우, KCC, 금호등의 유수 기업들의 인터넷 환경을 구축해주면서 자금의 여유가 생겼다. 이때 김택진 사장은 단순히 한국이 아니라 전세계에 통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싶었다. 대학부터 온라인 게임을 좋아했다. 평소 존경하던 그리고 그 해답은 게임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서 김택진 사장은 자신이 아는 최고의 게임프로그래머인 송재경씨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날개를 얻다.
서울대 컴퓨터 공학과 86학번인 그는 박사과정을 93년 한글과 컴퓨터에 입사하였다. 이미 대학을 다니면서 혼자 워드 프로세서를 개발할정도로 프로그래밍에 탁월한 실력을 갖췄다. 카이스트에 재학중일때는 유닉스 환경에서 한글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한텀을 개발하였다. 김택진 사장이 개발한 한메 한글과 비슷한 프로그램이었다. 한텀의 개발 직 후 송재경씨는 한글과 컴퓨터의 일을 도와주게 된다. 그는 한글과 컴퓨터에서 한텀을 더 강화시킨 한터를 개발하였다. 그런데 이때 마침 한글과 컴퓨터는 회사의 젖줄이라고 할 수 있는 아래아 한글의 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윈도우 버전 개발에 계속해서 실패를 하자 한글과 컴퓨터는 김택진 사장에게 SOS를 친다. 현대전자 직원이었던 김택진 사장은 회사의 협조를 얻어서 한글과 컴퓨터에 파견근무를 나갔다. 이때 김택진사장과 송재경 사장이 처음 만나게 되었다. 둘은 게임 매니아라는 공통점 덕분에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특히 텍스트 기반의 롤플레잉 게임인 로그를 무척 좋아했던 김택진 사장은 게임 플레이에 만족하지 않고 역시 원리에 집착하던 그였던 만큼 로그의 게임 소스를 수집하여 매일 연구중이었다. 그런데 마침 송재경 사장도 로그라는 게임을 무척 좋아했고 언젠가는 로그와 같은 롤플레잉 게임을 개발하자고 의기투합하였다. 하지만 김택진 사장은 현대전자의 병역특례요원이었음으로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복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송재경씨는 한글과 컴퓨터를 그만 두고 평생의 열망이었던 게임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때 탄생한 작품이 한국 최초로 상용화된 온라인 게임인 텍스트 기반의 머드게임 쥬라기 공원이었다. 텍스트 기반의 게임에 아쉬워하던 송재경 사장은 세계최초의 그래픽 기반의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을 개발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때 그가 처음 찾아간 인물도 역시 김택진 사장이었다. 게임에 대한 공동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서울대학교 동기생인 김정주씨와 함께 김택진 사장을 찾아갔으나 여전히 김택진 사장은 회사를 그만둘 수가 없었다. 결국 송재경 사장은 김정주씨와 함께 넥슨을 공동창업하였고 세계최초의 그래픽 기반은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 바람의 나라를 개발하였다. 하루에 8만줄을 프로그래밍 할정도로 온 열정을 쏟은 덕분에 송재경 사장은 슈퍼 프로그래머라는 극찬을 들었다. 바람의 나라가 서비스를 시작한 직후 송재경 사장은 병역특례를 위해서 넥슨을 퇴사하고 아이네트에 입사한다.
이때쯤 김택진 사장은 현대전자를 그만두고 엔씨소프트를 창업할때였다. 그래서 한글과컴퓨터에서 송재경씨와 함께 약속했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넥슨을 찾아갔다. 처음 김택진 사장은 송재경 사장과 결합하기 위해서 엔씨소프트와 넥슨의 합병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넥슨에 찾아가자 송재경씨가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네트에 입사한 사실을 알게된다. 그래서 다시 김택진 사장은 송재경씨가 다니고 있던 아이네트를 찾아간다. 하지만 아이네트의 사장은 허진호 박사였는데 김택진사장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송재경씨를 엔씨소프트로 데려오는건 선배인 허진호 박사에게 배신하는 기분이들었다. 결국 김택진사장은 송재경씨를 포기하고 회사로 돌아온다.
그런데 1997년 IMF 터지면서 아이네트에서는 송재경씨가 진행중이었던 게임 프로젝트 리니지를 전격적으로 취소시킨다. 애초에 아이네트에서는 게임 프로젝트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차였다. 이때 소식을 접한 김택진 사장은 한걸음에 아이네트로 찾아가 게임개발팀을 인수하겠다고 제안하였다. 아이네트에서는 구조조정차원에서 게임개발팀을 단군의 땅들을 서비스했던 마리텔레콤에 보내려했다. 이때 로열티의 10%를 주는 주고건으로 내보내는 것이었지만 김택진 사장은 리니지로 인해서 수익이 발생하면 로열티까지 지불하겠다는 좋은 조건을 내걸고 아이네트의 협조를 얻어서 게임개발팀을 영입한다. 말이 게임개발팀이지 사실은 그 모든 것이 송재경씨를 데려오기 위한 김택진 사장의 결단이었다.
재창조된 리니지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와 폴알렌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구글의 래리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처럼 김택진사장과 송재경씨는 환상의 결합이었다.
당초 리니지는 PC통신 기반으로 제작하였다. 그런데 엔씨소프트 내부에서는 전세계인들이 모두 즐 길 수 있는 게임이 되기 위해서는 인터넷기반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을 현실로 만드는데는 송재경 사장의 뛰어난 천새성이 발휘되었다. 한국최고의 게임프로그래머였던 송재경 사장이 리니지를 부드러운 에니메이션과 뛰어난 타격감을 자랑하는 게임으로 탄생시켰다.
98년 리니지가 처음 등장하자 사람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요약되었다. 한국 게임 같지않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한국 게임들은 일본 게임의 영향을 받아서 대부분 3등신에 아기자기한 만화풍의 그래픽이었던데 반하여 리니지는 8등신에 사실적이고 실감나는 그래픽이었다. 그래서 그래픽만 보면 한국게임보다는 미국게임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처음 리니지가 등장할때만 해도 게임서버에는 리니지에는 유독 외국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외국게임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게임에 외국인이 접속할 수 있는 것은 전세계인 누구나 접속 할 수 있는 인터넷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외국에서 인터넷으로 접속할 수 있는 게임은 리니지가 최초였다. 또한 리니지를 플레이 한 외국인들 역시 호평을 쏟아내었는데 인터넷에서 외국인들이 영어로 리니지 관련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당시 필자에게는 매우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런데 정작 엔씨소프트는 완성도가 높은 게임을 개발하겠다는 목표만 세우고 여기에 열중만 했지 정작 수익모델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 막상 엔씨소프트가 리니지게임을 완성 했지만 홍보방법이나 수익을 거두는방법에서 막막하였다. 당시 유일한 수익모델은 하이텔이나 천리안 같은 PC통신에 서비스 해서 부가사용료를 받는 것이었는데 리니지는 애초부터 PC통신에 서비스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었다. 또한 엔씨소프트는 PC통신이 수익금의 30%를 가져가는 것은 횡포라고 생각하였고 그런 부당한 계약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 엔씨소프트의 직원이 한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바로 PC방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PC방에서 정액제를 내고 리니지를 이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지금보면 너무나 당연한 수익모델이었지만 리니지가 처음 서비스가 될때만해도 획기적인 방법이었다. 당시 PC방은 오직 스타크래프트를 위해서 존재했다. 스타크래프트는 한번 게임을 구입하면 평생무료로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리니지는 매달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에 PC방 업주들은 이해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엔씨소프트에서는 적극적으로 PC방업주들을 설득해 나갔다. 스타크래프트는 한번 게임을 하면 아무런 기록도 남지 않지만 리니지는 모든 기록이 남고 성장과 육성이라는 측면에서 스타크래프트다 더 지속적으로 게임을 하는 요소가 있음을 강조하였다. PC방에서 오랜시간 게임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결국 PC방에도 이익이 되기 때문에 리니지에게도 이익이 된다. 엔씨소프트의 적극적인 홍보와 영업덕분에 리니지를 서비스하는 PC방이 늘어났다. PC방을 총판과 가맹점의 형태로 공략을 하게 되자 동시접속자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1998년말에 상용서비스를 시작하여서 그해에 천명의 동시접속자를 기록하였고 99년에는 만명을 2000년에는 십만명을 넘어서며 기하급수적으로 회원수를 늘려갔다. 리니지의 성공이후 2000년에 코스닥에 진출한 엔씨소프트는 한국 벤처기업중에서 최고의 황제주로 부각되었고 김택진 사장역시 최고의 갑부에 등극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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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저도 아이온을 하고 있는데.. 참 이런 대작을 만들수 있는게 부럽다는 생각을 합니다. "김택진" 하루에도 수십번 게시판에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이죠..ㅋ